격려와 위로의 삶

요즘 영어 설교시간마다 ‘Daniel Yang’ 목사님께서 “교회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시리즈로 말씀을 전해주고 계시다. 하나하나 우리 모두가 꼭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는 귀한 말씀들이 아닐 수 없다.

교회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구원이 선포되는 곳이어야 한다. 아울러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교회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회란 또한 모두가 ‘형제 자매로 지내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 즉 문지방이 낮은 곳이어야 한다. 또한 교회란 결코 ‘차별이나 다툼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 모두가 ‘한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는데 거기에 어찌 다툼이나 차별이 있겠는가. 다툼이나 차별이 있을 때 이는 곧 하나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곳이 교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에 다툼이나 차별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보실 땐 얼마나 더하실까.

여기서 나는 교회에 대해 특별한 모습을 하나 더 언급하고 싶다. 교회란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란 잘난 사람들, 의인들,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죄인들, 상처 입은 사람들, 못난 사람들,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주님 곁에 찾아왔던 사람들이 다 그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같은 사라들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다.
교회는 일종의 의원(醫院)과 같은 곳이다. 즉 아픈 사람들이 나와서 치료 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를 받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문제의 해결을 받는 곳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가복음 2:17)고 하셨다. 우리 주님은 분명 병든 자를 위한 의원으로 오셨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마음에 병든 자들, 상처가 있는 자들, 고민하는 자들을 싸매어주시고 그들을 치료하시기 원하신다. 그렇다면 무슨 얘기인가? 교회는 마땅히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란 주님의 사역을 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격려와 위로가 넘칠 때 그곳이 교회다운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그 상처에 대해서 손가락질하고 험담한다면 그곳은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떠난 교회라 할 것이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격려와 위로’의 사람을 찾으라면 ‘바나바’라는 사람을 들 수 있다. 그 이름을 말할 때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와 비슷한 이름의 사람으로 ‘바라바’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빌라도에 의해 예수님 대신에 풀려난 살인자이고 ‘바나바’는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구브로(Cyprus) 섬 출신의 유대인으로 비록 열 두 사도 가운데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가까이서 예수님을 따른 사람으로 다른 사도들과 거의 동급의 평가를 받을 만한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과 더불어 이 ‘바나바’에 대해서 ‘사도’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
성경은 이 ‘바나바’에 대해서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사도행전 11:24) 착한 사람이 무슨 말인가?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면 ‘착하다’는 말을 풀이하기를 ‘착실하고 마음이 너그럽고 인정이 두텁다’고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는 한마디로 남에게 전혀 해를 끼칠 줄 모르는,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너그러운 그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사용된 이 ‘착하다’는 말은 ‘선행’과 관계된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선을 베푸는 것과 관계된 말이다. 즉 그는 단순히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운 사람이 아닌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었는가? 성경을 보면 자신의 상당한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했다.(사도행전 4:34-36 참조) 한 마디로 ‘바나바’는 구체적으로 남에게 선을 베풀 줄 아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격려와 위로의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의 가장 아름다운 성품이었다. 사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고 ‘바나나’는 일종의 Nickname(별명)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왜 그렇게 불렀는가? ‘바나바’란 이름의 뜻은 ‘격려자’라는 뜻이다. 이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그 ‘격려와 위로’가 바로 기독교 역사상 불세출의 인물인 ‘바울’을 탄생시켰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본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박해자였다. 그런데 그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적을 경험하고 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되었다. 즉 이제껏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잔해하던 자가 이제는 거꾸로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을 감옥에 잡아넣은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겐 여전히 그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있었다. 바울이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속임수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그 같은 상태에서 전전긍긍하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앞장서서 바울을 소개하고, 앞장서서 바울을 기독교 공동체 가운데 밀어 넣은 사람이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이었다. 바나바 덕에 바울은 사도들의 세계, 믿음의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만일 바나바가 아니었더라면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결국 ‘바나바’의 ‘격려하고 위로하는 은사’가 바울을 바울 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면 ‘바나바’가 어떻게 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물론 그가 본래 남보다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럴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행전 11:24)이라고 했다. 즉 그가 선행을 베푸는 착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격려와 위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그것은 그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바나바’는 성령이 다스리는 사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사람이 어디 ‘바나바’뿐인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 성령이 그 안에 머물고 계시는 사람이다.(로마서 8:9 참조) 다만 문제는 사람들이 그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뿐이다. ‘성령 충만’이란 곧 성령께서 그 사람을 강하게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누구든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삶을 살 때 ‘바나바’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 즉 ‘착한 삶’ 나아가 ‘격려하며 위로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교회는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이는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와 같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으로 알라! 우리 교회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인지 아닌지를. 내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내 삶에 ‘격려하는 삶’ ‘위로하는 삶’이 있다면, 우리 교회에 ‘격려와 위로’가 넘친다면 나와 우리 교회는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여인이 한 사람 있다. 그녀는 10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 때부터 그녀는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녀는 20세에 결혼을 했다. 그녀가 결혼한 남편은 젊고 패기 있고 장래성이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남편이 관절염에 걸려 다리가 말라버리는 불행에 직면케 되었다. 그로 인해 남편은 쇠붙이를 다리에 고정시킨 채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남편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불구자가 되었는데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그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줄 아셨나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삶이예요. 당신의 다리가 아니에요.”
이 말은 다리 불구자가 된 뒤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남편에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결국 그 남편은 다리 불구자임에도 불구하고 1932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36년에 다시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1940년에 3선, 그리고 1944년에 4선까지 되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바로 ‘루즈벨트’(Roosevelt) 대통령이다. 그리고 그 부인이 바로 ‘엘레나 루즈벨트’ 여사이다. 그녀는 남편을 격려하고 남편에게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준, 그리하여 남편을 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여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가운데 처한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넣어주는 가장 대표적인 본을 보인 사람이 되었다.
바울이 있기 위해서 ‘바나바’가 있었던 것처럼, 루즈벨트 대통령이 있기 위해서 그의 부인 ‘엘레나’ 여사가 있었다. 바나바와 엘레나 여사, 두 사람 다 격려를 통해 역사상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격려와 위로’란 이처럼 위대한 것이다. ‘격려’란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남을 격려하고 세우는 것,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남이 잘못했을 때 용서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책망하고 비난하고 기회가 있을 적마다 험담하는 그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령을 모신 사람들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삶은 용서하고 위로하고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삶이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격려자, 위로자로 오신 것을 기억하라! 주님께서는 희망이 없는 죄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초대의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니, 단지 그 같은 사람들을 초대하신 정도가 아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다. 한 마디로 우리 주님의 삶은 ‘위로의 삶’이요 ‘격려의 삶’이었다.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모습을 본 받는 삶, 즉 ‘격려와 위로의 삶’이 있어야 할 것이다.